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문단 편집) == 평가 == '''[age(1774-09-29)]년 전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감수성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다. 지금 읽어봐도 왜 [[베르테르 효과]]가 나왔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불륜]]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을 표할지 모른다. 실제로도 현대에서 이 작품을 리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플롯만 따지고 보면 막장 불륜 드라마 같다는 드립을 치는 사람들이 간혹 보일 정도다. 그러나 이 소설이 몇 세기 전에 쓰여졌는지, 그리고 당시 문학의 주류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또한 막연히 [[짝사랑]]에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의 대립은 '감정'과 '이성'의 대립을 상징하며 넓게 보면 '개개인의 감성'과 '획일화된 집단'의 갈등을 상징한다.[* 원래 괴테가 작가로서의 정체성 이상으로 계몽주의 사상가의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사회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그나마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편력시대에 비해 이런 상징성이 적고 구조가 단순한 편.] 베르테르가 쓴 편지에도 짝사랑의 고단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속물스런 귀족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거나 출세 지향의 안일한 공직 사회에서 고통받는 모습[* 작가 본인 역시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했다. 자세한 것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작가 본인]]의 항목 참조.]과 함께 자연과 종교, 행복 등을 아우르는 철학적인 고민이 쓰여 있다. 처음 나올 당시에도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 왕족이든 귀족이든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읽어댔고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라는 평도 얻어냈다. 눈여겨볼 점은 알려진 것과 달리 괴테는 이 작품으로 그다지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 출판사가 [[듣보잡]] 애송이 작가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 [[해적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큰 유명세를 떨쳤고 결국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 고위 귀족인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이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한다. 괴테는 3년간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돈은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원이 지겨워져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면서 공작을 속이기도 했다. 다만 공작은 괴테가 공무원을 지겨워한다는 걸 알고 글만 잘 쓴다면 그만큼 돈을 주고 후원하겠다고 나서는 등 그를 잘 이해해 주었기에 비로소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이때 나이가 30대였으며 아우구스트 공작은 나중에 괴테를 친구같이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즉 이 소설 자체로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괴테를 유명하게 만들고 풍족하게 살게 만들어준 건 사실이다. 괴테와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이자 괴테를 존경하던 [[극작가]] [[실러]](1759~1805)는 16살 때 이 소설을 읽고 경악했다고 한다. 소설을 심리적으로 공감이 가게 만드는 이 괴테는 대체 누구냐고 감탄했는데, 5년 뒤에 자신이 살던 곳의 영주 명령으로 억지로 사관학교로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괴테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 [[영주(중세)|영주]]인 오이겐 [[공작(작위)|공작]]이 일개 평민에 불과한 젊은 나이의 괴테[* 다만, 괴테는 평민 출신이지만 아버지부터가 왕실 고문관까지 오른 귀족급 거물에 부유층이었으며 외할아버지도 평민 출신으로 프랑크푸르트 시장인 부유층으로 결국 둘 다 귀족 작위를 받았고 괴테도 폰이라는 칭호를 봐도 알겠지만 귀족이었다. 이를 두고 다른 분석도 있는데 [[부르주아]] 출신으로 신사 계층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했어도 근세~근대 유럽의 신분제 체제하에서 '영주' 와 '신사'는 명확히 다른 계급이다. 즉, 계급을 단순히 평민-귀족으로 도식화해서 괴테 역시 귀족과 맞먹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니 귀족인 영주와 비슷한 계급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완전히 [[착각]]. 오히려 해당 영토의 군주인 영주의 관점에서 보면 농민이나 장인, 상인이든 신사든 자신의 통치 대상인 신민, 또는 신하의 입장에 있었던 것. 즉 군주가 그 신민에게 정중히 예의를 취할 정도로 괴테가 받은 사회적 존경이 엄청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당장 괴테의 다른 작품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만 보더라도 하급 귀족이나 부르주아와 같은 신사 계층과 토지를 가진 지주 귀족(영지 귀족) 사이에 상당한 신분의 격차가 있었으며, 영주들이 신사 계급을 자신의 신하 정도로 여겼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인의 역사 인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시대의 경우 조선 사회 전체를 통틀어 통치자(군주)라 할 수 있는 이는 왕 딱 한명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이다. 반면 중세 이래 근세~근대까지의 유럽 사회에서는 일단 '유럽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 자체가 여럿인데다 각각의 영주들이 자신이 영지에서는 군주(lord)였던 봉건제의 흔적까지 남아있던 탓에 통치자(군주/영주)들 자체가 하나의 계층(계급)을 이루는 집단으로 존재했던 것. 그러니까 한국인들은 '대귀족(영주)/신사 계층(소귀족~부르주아)의 관계'면 조선 시대로 쳤을 때 양반중에서 명문가 출신/한미한 집안 출신 정도의 신분 격차가 날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실상은 이보다 훨씬 큰 격차로, 역시 조선시대에 비유하면 '왕/신하의 관계'와 정도는 덜하지만 성격은 비슷한 격차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한 문인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날려 국왕도 그를 정중히 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점은 실러의 개인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더 이해하기 쉬운데, 당시의 신분제도에서 신사 계층 출신인 '''실러와 비슷한 계층에 속하는 인물은 바로 괴테'''였다. 엄밀히 따진다면 군의관의 아들인 실러에 비해 시장의 외손자이고 고위 관료의 아들인 괴테가 신사 계층 내에서는 훨씬 더 위세있는 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관료나 상인(상업 도시의 시장) 모두 주로 평민(부르주아)의 직업이었으므로 괴테 역시 평민 출신으로 출세해서 작위를 받은 신사 계층 하급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것. (그리고 실러 역시 이후 문필로 이름을 날려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말하자면 괴테 집안이 실러 집안보다 좀 더 먼저 출세한 격이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실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러의 초년생은 귀족(뷔르템베르크 영주 오이겐 공작)의 온갖 행패와 갑질에 시달리며 자기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고, 쓰고 싶은 책도 못 쓰는 고통과 억압에 치를 떠는 질곡의 나날이었다. (오이겐 공작의 사고방식은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내 신하니까 무조건 내가 명령하는 것을 해야지, 어디 감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내세우냐" 는 식이었다.) 그런 실러가 보기에 자신에게는 그리도 오만하고 고압적이던 오이겐 공작이 자신과 비슷한 계급 출신인 괴테에게는 정중한 예의를 보이고 있으니 엄청난 충격을 받고 눈이 돌아가 "나도 위대한 업적을 세워 더이상 귀족들이 나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이미 그런 업적을 세운 괴테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던 것.]를 정중히 모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러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소설 하나 때문에 영지민들에게 가혹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던 영주가 스스로 몸을 낮추게 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회고하며 자신도 글을 쓰기로 마음먹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 실러가 괴테에게 부러움과 존경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러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실러는 탈영하여 멀리 달아나 어렵게 살면서 희곡과 글을 써 왔고 40대 가까이 이르러서야 비로소 괴테에게 찬양받으면서 대박을 거두고 [[성공한 덕후|그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으며]] 43살에는 마침내 귀족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은 전쟁터에도 이 책을 가지고 다녔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16번을 읽고 또 읽었다. 심지어 이 책을 토대로 자작 소설까지 써봤지만 망했다고. 대불 동맹을 분쇄하고 [[독일]]을 점령한 나폴레옹이 드디어 괴테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다 좋은데 주인공이 귀족들로부터 창피당하는 장면은 내용에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며 태클을 걸었으나, 괴테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나폴레옹(그리고 그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은 본 소설을 단순히 [[연애소설]]로 보고 연애와는 아무 연관 없는 장면에 대해 그러한 조언을 한 것이겠으나 여러 주제를 담으려던 괴테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그 밖에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가 이 책을 사악한 책[* [[자살]]을 저지르는 주인공이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겐 사악한 것이 당연할 수 있다.]이라 비난하면서도 20번도 넘게 읽었다고 회고했다. 이 영향으로 멀리 [[중국]]의 두 남녀가 그려진 도자기가 [[유럽]]에 팔리기도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결국 교황청에서도 [[금서]]로 지정했지만 해적판이 더욱 많이 나와 책을 더 유명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근대화]] 시대 [[동아시아]]에서 소개되었을 때 신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충격]]을 던진 작품이기도 하다. 마오둔[* 마오둔(茅盾)은 필명이고 본명은 선더훙(沈德鴻). 중국의 문학가이자 마오쩌둥을 도와 공산당 창당을 도왔으며 마오쩌둥의 비서이자 문화부 장관으로 이후 당간지를 집필하는 데 도움을 줬다.]이 [[미국]]의 언론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질문한 것 중 하나가 __'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연애가 그저 문학가의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__는 것이었을 정도. 이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시기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인 '[[개인]]의 발견'과 관련이 있다. '충효'와 같은 가치관 이전에 개인과, 개인의 자유 및 감정이 있다는 근대 서구적 가치관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그런 '개인'의 가장 중요한 상징은 [[결혼]]과 같은 문제를 가문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는 '[[연애]]'였으며, 이 때문에 연애 소설들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자유연애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상징으로서 유행하게 된 것. 그런 상황에서 이 작품은 특유의 섬세한 감정 묘사와, 주인공이 사회적으로 권장할 만한 일이 결코 아닌 선택을 했음에도 많은 사람 속의 애도 속에 묻히는 결말, 이런 이야기가 소설의 형태로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특별한 충격을 일으킨 것이다. 동아시아권에서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을 개인의 욕망 때문에 완전히 저버린다'는 것 자체를 아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으며, 어쩌다 그런 사람이 나오더라도 '에에잇! 저런 천하에 몹쓸 것! 소문날까 두려우니 시체일랑 거적에 싸 말아서 내다 버려라!'라는 경멸을 한몸에 받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